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08)

라파공동체2026.03.28 15:232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08)



 <Colony 신학>이란 Colony를 이루고 사는 아미쉬, 후터라이트의 신앙과 삶을 신학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라 말할 수 있습니다. <Colony 신학>과 가장 유사한 신학은 아마도 <공동체 신학>, <평화 신학>, <시골 신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국가, 문명(문화), 도시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발전과 진화의 역사에서 이들 요소들은 궤를 함께 하며 발전과 쇠락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마치 로마라는 국가와 문명, 도시가 발전과 쇠락을 경험한 것처럼 개별 국가와 문명, 그리고 도시는 발전과 쇠락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국가와 문명, 도시는 계속해서 발전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되려고 하는, 혹은 이미 신의 권좌를 차지한 것 같은 <호모 데우스>의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와 문명, 도시는 돈, 섹스, 권력의 실체와 정확하게 대응합니다. 현대 국가와 문명, 도시는 돈, 섹스, 권력으로 상징됩니다. 돈, 섹스, 권력에 긍정적인 점이 있고 부정적인 점이 있듯이 국가, 문명, 도시에도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있습니다. 국가, 문명, 도시의 부정적 측면을 해소하기 위해 정립된 신학을 <공동체 신학>, <시골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개인주의화 되고 물화(物化)된 현대인의 삶의 대안이 공동체이고, 중독화된 도시의 삶에 대한 대안이 시골에 있음을 주장하는 신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시골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삶’이 현대 국가, 문명, 도시적 삶에 드리운 그늘을 극복하는 대안적 삶임을 주장하는 신학인 것입니다. 



 북미로 이주한 아나뱁티스트 선조들은 농촌과 시골에 정착하여 하나님 나라의 Colony를 세우고 수백년을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이들의 뒤를 이어 100여년 전에 독일에서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한국에서도 6-70년 전에 예수원과 동광원이 세워졌습니다. 전세계적 차원에서 아미쉬와 후터라이트의 농촌 Colony 삶을 모델로 새로운 교회, 공동체 교회, 

기독교 공동체가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국가, 문명, 도시적 삶의 핵심 가치는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더 화려하게, 더 편의적으로, 더 이익이 남게, 더 성공적으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의 수혜 주체는 철저히 개인입니다. 이러한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반대 급부로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비적응자와 부적응자, 과잉 적응자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도태되며, 배제 당하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됩니다. 소수의 성공자의 그늘에서 다수의 ‘루저’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구조적으로 형성됩니다.  



 이에 비해 시골의 삶의 가치는 “느림, 기다림, 함께 함, 소박함, 아웅바둥대지 않음”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가치는 농촌에서도 ‘농사’를 삶의 기반으로 삼을 때 드러나는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봄에 심어서, 여름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저장하는 삶의 양식, 날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으로부터 농부들은 위와 같은 삶의 가치들, 곧 존재의 연약성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한국 농촌의 전통적인 생활 양식인 ‘두레, 품앗이, 울력’은 농촌과 농사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공동체적으로 빚어질 수 밖에 없음을 드러내 줍니다. 도시적 가치가 오늘날의 농촌과 농부들을 잠식한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농촌의 가치는 도시적 가치에 의해 잠식당하고, 공동체성도 급격히 붕괴되었습니다. 농부의 숫자는 나날이 줄어 들고 있고, 농촌 자연단위 부락들에서는 아기 울음 소리 그친지가 벌써 오랩니다. 도시는 점점 비대해 지는데 농촌 소멸, 농촌 해체의 위기가 전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시는 공룡화 되면서 주변 농촌을 잠식하여 덩치를 더 키우고, 더 멀리 떨어진 농촌은 황폐화 시킵니다. 농촌이 소멸되고 공룡화된 도시만 살아남게 된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 없는, 인간이 스스로 신으로 등극한 세상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도시 문명의 출발 자체가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던 바벨탑 사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중심적 주제 중의 하나는 “바벨” 혹은 “바벨론”입니다. 창세기에서 “바벨탑”을 무너뜨린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에 대한 궁극의 심판을 완성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를 원치 않으십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스스로가 피조물임을 인식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예인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다루는 자의 조상이 됨으로써 인간 스스로 즐거움을 누리는 길을 열었고 두발 가인은 구리와 쇠를 통하여 여러 기구를 만드는 자가 됨으로써 기술 문명의 시작을 알렸는데 이것들은 하나님이 없는 가운데에서 인간이 스스로 즐거움을 만들고 외부적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창세로부터 시작된 반하나님적 문화·문명·기술의 역사는 계시록에서 “바벨론”으로 완성되어 나타납니다. 곧 반하나님적 문화·문명·기술의 집약체인 “제국의 거대 도시”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라지게 되고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이 땅 위로 임하는 새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한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 포교의 자유가 결정되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로마의 국교로 결정된 이후 지금까지의 기독교 신학은 ‘도시와 도시인’을 대상으로 전개된 ‘도시 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에겐 아미쉬, 후터라이트 형제들의 삶을 모델로한 <Colony 신학>, <시골 신학> <공동체 신학>이 필요합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