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03)

라파공동체2026.03.28 15:232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03)  



 감리교 신학자이지만 존 하워드 요더의 신학을 창조적으로 계승했다고 평가받는 스탠리 하우워어스는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신학을 ‘변방 급진주의’에서 주류 신학으로 끌어 올린 인물이라고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요더를 읽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 역시 요더와 같이 교회를 이 세상에 대한 대안 사회요 기관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대안적 삶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훈련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크리스텐돔 이후의 교회에 대한 그의 고민을 다룬 책 「교회의 정치학」(백지윤 역, IVP, 2019년) - 원제는 크리스텐돔 이후의 교회인데 출판사에서 책 제목을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과 연결시켜 결정한 듯 한데 - 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조적공이 벽돌쌓기를 훈련하듯이 구원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우워어스의 아버지가 조적기사였고 청년 시절 그는 아버지로부터 조적 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그의 연구실에 아버지의 조적 연장을 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는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독교적 도덕과 윤리를 훈련해야 하는데 이는 세상의 가르침, 곧 네가 주인이니 네 맘대로 행해도 좋다는 식의 자유주의 신념이 절대 진리인 양 통용되고 있는 현세대 속에서 특히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훈련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는 기술을 습득해야 하고, 피조물임을 인식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겸손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곳이어야 하고, 죄를 서로 고백하는 고백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는 세상의 대안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은 또한 세상의 것과 대조적인 것이어야 하고, 대항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이며, 피조물임을 인식시켜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저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1995년 처음 교회에 출석 한 이후 저는 엄청난 양의 교회내 신앙 훈련 프로그램을 이수했습니다. 당시 가장 높은 수준의 신앙 훈련이 이른바 ‘삶 시리즈’로 불렸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기도의 삶」, 「부부의 삶」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마지막 프로그램인 「부부의 삶」 프로그램을 마치면 프로그램에 함께 참가한 부부들을 대상으로 “언약 결혼식”이라는 두 번째 결혼식을 예배당에서 조촐하게 거행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결혼 생활을 회개하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새롭게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의미에서 거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아 세례가 진정한 세례가 아니어서 아나뱁티스트들이 진정한 두 번째 세례를 서로 주고 받았던 것처럼 그때의 두 번째 결혼식의 의미도 그러했습니다. 결혼식은 두 번째이나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행하는 진정한 첫 번째 결혼식이었던 것입니다. 여느 결혼식과 똑같이 결혼 예식 중 서로의 고백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무슨 고백을 주고 받았는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저의 고백 중 잊지 않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고백의 마지막 문장은 “여보 우리, 평생 죄인의 자리를 떠나지 맙시다” 였습니다. ‘나의 죄인 됨’에 대한 깨달음은 제 평생에 가장 큰 깨달음이 되었고 제 삶을 규율하는 최종 근거였습니다. 제 생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제가 ‘죄인 됨’의 자리를 넘어서는 순간부터일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장 안전한 자리는 ‘죄인의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가 제게는 ‘은혜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인 됨’이 없었다면 주님의 ‘은혜’도 없었을 것입니다. ‘은혜’는 죄인 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는 ‘의롭다 여김 받게’ 되었을 뿐, 의로운 자가 된 것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어던지기 전까지 죄성은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우리를 부리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우워어스를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우리의 죄인 됨’이라는 기독교의 정통 교리에 근거해 그의 신학을 전개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탠리 하우워어스는 존 하워드 요더와 함께 칼 바르트의 제자였습니다. 그의 신학은 바르트의 신학과 요더의 신학을 합쳐놓은 것과 같습니다. 신정통주의자라 불린 바르트의 신학을 이어받은 연고로 하우워어스의 신학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확고히 기초합니다. 그 이유와 목적은 “죄인된 우리들의 구원과 새롭게 하심”에 있습니다. 죄인된 우리들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신 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야기”가 복음의 핵심이고 교회는 그 이야기를 보존하고 전하며, 그 이야기를 삶으로 살아내는 기관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마다의 신자들은 그 이야기를 자기들의 삶으로 살아낸 또 다른 이야기의 담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우워어스의 저작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감리교 감독이었던 윌리엄 윌리몬과 공저한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Resident Aliens)」(김기철 역, 복 있는 사람, 2008, 2018년)일 것입니다. 그 책에서 하우워어스는 당대 신학의 최고봉이었던 폴 틸리히와 라인홀드 니부어를 비판합니다. 그들은 복음과 교회를 세상과 세상 문화에 가져가려고 애썼는데 결과적으로 복음의 핵심은 희석되었고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순응하게 되었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그들은 복음과 교회가 세상을 변혁시키기를 원했지만 결과적으로 복음과 교회가 변혁당했고 교회는 “교회다움”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우워어스는 교회가 세상을 변혁하려 하지 말고 “교회 다움”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때 세상의 변혁도 가능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더에게서 차용한 대로 그는 교회가 ‘정치적’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교회가 진리의 담지자가 되어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이 되며, 윤리의 모델이 되어 세상에 대해 대안적이고 대조적이며 대항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교회론 전반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가 이 책을 비판하면서 그에게 붙여준 이름, Neo Anabaptist와 관련해서는 무엇인가 할 얘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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