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01)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01)
라파공동체에 소속된 네 개의 기관은 아나뱁티즘을 총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저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제 사역의 시작은 세상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제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전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려운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저는 장애인, 노숙자, 알코올중독자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알코올중독자들에 대한 치유 선교의 목적으로 세워진 <라파중독치유공동체>의 본이 된 것은 영국의 기독교 치료공동체인 <켄워드 트러스트> 였고, 한국의 <예수원> 이었습니다. <예수원>을 보고 중독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나누다 보면 치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게 되었고 <켄워드 트러스트>를 통해서는 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서 중독이라는 고질적인 병을 치료하려면 그에 합당한 전문성을 구비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독이라는 ‘정신 장애’(mental disorder)를 정신과 의사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역량과 실제 임상 수련을 통한 전문성의 구비가 요청되었습니다. 중독 치유 사역을 십 년쯤 하다 보니 눈이 떠지더군요. 그때까지의 경험을 책으로 펴낸 것이 「사랑이 희망이다」(생명의 말씀사, 2009년) 였고, 공동체를 통한 치유 현장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중독과 치유」(대장간, 2011년)였습니다. 중독의 치유를 위해 기독교 신앙과 심리학의 통합이 필요하였는데 이를 성경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한 「버려진 땅에서 우리는 인간이 된다」(대장간)를 2018년에, 영화 속에서 드러난 중독 이야기를 대중적 관점에서 풀어낸 「영화 속 중독 이야기」(대장간)를 2025년에 출간하게 됩니다.
25년간에 걸친 중독 치유 사역의 성과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치유 가능성의 발견과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독,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독 치유의 가장 큰 도구는 “공동체”와 그 속에서 “함께 나누는 삶”이었습니다. 떼제 공동체의 신한열 수사가 떼제공동체와 그곳에서의 자신의 삶을 그려낸 책의 제목을 「함께 사는 기적」(신앙과 지성사, 2017년)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는 서로 다른 국가, 서로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며, 또 함께 살므로 하나님의 숱한 기적을 경험하며 산다는 의미였습니다. <라파중독치유공동체>에 대해서도 저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입니다. 공동체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은 그리스도의 육화된 사랑이 공동체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꽃피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공동체적 삶을 추구하는 이유도 아마 공동체로 모여 함께 사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육화된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독치유의 가장 큰 비결은 사랑, 곧 육화된 사랑입니다. 살과 살을 통해 전달되고 느껴지는 그 사랑이 중독자를 변화시키고 치유합니다.
아나뱁티스트가 되는 길에서 반드시 정리되어야 할 신학이 있다면 <공동체 신학>일 것입니다. 공동체란 무엇입니까? 그것과 교회는 다른 것입니까? 다르다면 무엇이 다르고 같다면 무엇이 같은 것입니까?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제게는 이러한 본질적인 질문을 해 주는 아내가 옆에 있습니다. 제가 ‘공동체, 공동체’ 하며 노래를 부를 때 아내는 옆에서 강력한 질문으로 저를 당황시키곤 했습니다. “왜 꼭 공동체여야 해? 그냥 교회하면 안돼? 꼭 공동체여야 해?” 이런 정곡을 찌르는 아내의 질문에 응답하면서 저의 공동체론, 공동체 신학도 정립되어 갔습니다. 아내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 안에서 우리는 ‘공동체’와 ‘교회’ 사이에 깊은 간극이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공동체’란 단어를 좋아합니다. 세상의 모든 영역에 이 단어를 적용시키고 싶어 합니다. 교회 공동체, 병원 공동체, 회사 공동체, 동호인 공동체, 장애인 공동체 심지어는 교도소도 공동체라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공동체로 사는 것, 공동체를 이루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사고에 깊이 물들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공동체를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는 영역으로 인식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한국 기독교 안에서는 정치 이데올르기, 특히 반공주의 이데올르기에 강한 영향을 받아 공동체를 주장하고 강조하는 이들에게 ‘좌파‘란 딱지를 붙이고 경원시 하는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교회의 공동체성‘을 이루고 회복하는 일에는 다 찬성하지만 막상 공동체를 한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론’에 대해서 논하자면 책 한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공동체와 교회에 대해서는 초대교회의 삶의 양식을 기초로, 카톨릭의 수도회, 수녀회의 수도공동체 존재양식을 준용하고, 아나뱁티스트 중에서 후터라이트와 아미쉬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준거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공동체성을 강하게 표방하는 “공동체 교회”는 아나뱁티스트 그룹 중 메노나이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