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94)

라파공동체2026.03.28 15:232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94)



 <육화 신학>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성육신 교리> 와는 차원이 다른 개념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주로 사용되고 언급된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이 된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설명하는 단어였습니다. “성육신” 사건은 초대 교회 교리 형성사에서 삼위일체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론 형성의 근거가 되었고 신비적 차원에서 주로 언급되어 왔는데, 일상 생활의 지평에서 일어나는, 아니면 일어나야 하는 삶의 실제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일 뿐만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곧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가고 동화되어 가는 신화(神化)의 길을 열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성육신은 곧 신의 인간화와 인간의 신화를 동시에 가능하게 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성육신의 과정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에 그것은 신비의 영역 안에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몸을 매개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몸이 실재적인 것 만큼이나 실재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을 실재의 관점에서, 실생활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 여동생인 윤성련 목사의 2024년 연세대 신학과 박사 논문 「신체 현상학을 통한 육화 개념의 수평적 이해 – 고백자 막시무스의 창조적 육화론과 메를로-퐁티의 살 존재론을 중심으로」는 그러한 관점에서 성육신을 연구한 좋은 논문입니다. 성육신의 본질은 육화입니다. 그래서 이 논문은 성육신이라는 단어 대신 육화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신비의 베일에 쌓여 실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이 사용되어온 성육신을 인간 삶의 실재로 제시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몸에 육화된 그리스도를 입고 육화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나 “신체 현상학”을 주창한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나 동일한 요청이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반영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고백자 막시무스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7C 동방교회의 신학자요 수도사였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7C는 삼위일체 신학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던 시기였는데 막시무스는 그의 생애 말년에 “의지 논쟁”에 휘말려 교리적 이단으로 정죄되어 혀가 잘리고 팔이 절단되는 고문을 당합니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막시무스는 자기의 신념을 고수하였는데  끝내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는 사후에 복권되었고 순교자 칭호 대신에 “고백자 막시무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의 신학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논문에서 소개하는 “창조적 육화론”입니다. 막시무스는 성육신의 원리를 우주 전체의 창조와 완성의 원리로 확장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자체가 신성을 우주 안에 불어 넣은 사건으로 피조 세계와 피조물 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신성이 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 이전에 이미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심으로 이 우주에 성육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피조 세계 전체가 함께 고통을 겪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전체 피조 세계의 회복과 구원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막시무스에 의하면 창조 세계는 로고스로부터 나와 로고스로 다시 돌아가는 거대 여정 속에 있으며,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을 품고 있는 ‘성육신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7C에 그는 이미 21C 생태 신학의 핵심을 성육신의 관점에서 짚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육화론은 동방 교회 중심 사상의 하나인 신화(神化)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은 인간을 하나님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Divinity)에 참여할 때 비로서 인간으로서의 참된 창조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인 바, 신화된 인간은 그 사랑을 자기 안에 갖게 되어 그 사랑을 타인에게 행하며 사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성육신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육화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기독교의 육화 신앙을 자신의 “신체 현상학”과 연관하여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프랑스 철학자들, 메를로-퐁티 뿐만 아니라 요즘 읽고 있는 장 뤽 낭시나 들뢰즈, 심지어는 자끄 엘륄 조차도 저에겐 여전히 높은 벽입니다. 그들의 사상을 따라가려면 머리가 아픕니다. 제가 이해한 바대로 메를로-퐁티의 사상을 육화 신학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서구 철학의 육체에 대한 정신(영혼) 우위설이나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적 사고를 반대하고 정반대로 신체 / 몸/ 살의 우선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사람의 정신에게 들어온 것이 아니라 몸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의 예수 되심은 몸을 가진 존재가 되심으로, 비가시적 하나님이 몸을 가진 가시적 존재가 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메를로-퐁티에게 몸은 정신보다 앞섭니다. 몸으로 지각하고 감각한 것이 정신세계를 구성합니다. 세상 모든 만물은 살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는 딱딱한 살을 가지고 있고, 물은 물 나름의 살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 역시 살을 가진 존재여서 나무를 만지고 물을 만질 때 나무의 살과 물의 살과 내 몸의 살이 만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막시무스의 몸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이자 장소입니다. 내 몸 안으로 그분이 오셨으므로 나는 내 몸 안에서 그분을 보고 만지고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지실 때 나는 그에게 만져집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나의 몸 역시 그분을 만집니다. 메를로-퐁티의 몸이 나무를 만질 때 나무는 만져지지만 동시에 나무는 나를 만집니다. 몸의 오른손이 왼손을 만질 때 왼손은 만져지지만 동시에 오른손을 만집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내 몸과 세상 만물은 교류와 접촉을 통해 연결됩니다. 이 연결과 접촉의 세계에서 주체와 객체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주체가 객체이고 객체가 주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고 나와 너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일체의 차별이 철폐되는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의 새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에 깃든 신성은 몸과 몸, 살과 살의 접촉과 만남을 통해 온 피조 세계로 전이됩니다. 곧 만물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성 또한 몸을 떠난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과 지각을 통해 세계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몸의 영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따뜻한 품으로 안아줄 때 그리스도의 육화된 사랑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인류는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메를로-퐁티에게 육화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고 생활 세계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삶의 양식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수직적 육화가 인간 사이의 수평적 육화로 발현되는 것입니다. 수평적 육화 신학의 관점에서 전태일 형제의 삶과 마리안느 마가렛 자매님의 삶은 그리스도의 수직적 육화가 사람 사이의 수평적 육화로 나타난 육화적 삶의 전형이었고 우리가 필히 따를 모범적 생활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육화된 삶을 살아가는 오직 한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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