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91)

라파공동체2026.03.28 15:232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91)



 톨스토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와 깊은 연관을 같습니다. 나 자신이 아나뱁티스가 되기로 결정하는 긴 과정에서 늘 중심이 되던 질문은 ‘진정한 신자는 누구인가?’, ‘진정한 교회는 누구인가, 무엇인가?’였습니다. 톨스토이의 관심도 같았습니다. 러시아 제정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볼세비키 혁명의 물적, 정신적 토대가 성숙해 가는 시대 속에서 톨스토이는 신앙 안에서, 성경 안에서 진정한 신자와 교회에 대한 답을 찾고자 애쓰고 분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의 현현”과 같은 신비체험을 통해 회심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그 대신 그는 가난한 농민들의 소박하고 투박한 신앙을 관찰하는 가운데 이성적 통찰과 사유에 의해 성경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 가르침의 핵심 진수를 파악하게 됩니다. 특히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내면화하고 삶의 양식 삼아 평생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의 신학의 결정판인 「하나님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의 부제는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가 아닌 새로운 생활의 이해다”였는데 이 부제를 통해서도 그의 신앙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신비적 요소와 초자연적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조리 사상시키고 2,000년 역사를 가진 정교회 신앙과 교리를 철저히 부정한 그를 정교회는 마침내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문하기에 이릅니다.



 톨스토이는 스스로 백작의 지위도 내려놓고 농민을 자기의 형제로 여기며 그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소유와 재산을 기꺼이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놓았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체제에 반대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철저하게 비폭력 무저항의 예수 정신을 실천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시대의 깨어 있는 양심이 되어 제도 교회의 가식과 위선, 부패와 타락을 고발하였고 기꺼이 고통받는 가난한 자들의 편이 되었습니다. 요컨대 그는 “죄와 구원”보다도 억압받는 가난한 자들의 자유와 평등을 더 중시했고, 폭력적 국가체제로부터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내는 일이 예수님 사역과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보았고 그것을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자, 이제 우리에게 남은 질문 중의 하나는 이것입니다.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인인가? 진정한 신자인가?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과연 ⓵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 ⓶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고백 ⓷ 성육신, 십자가 대속, 부활의 구원사적 의미 ⓸ 은혜에 의한 구원 ⓹ 교회의 공동체성과 성례전(예배) ⓺ 성경의 영감과 권위 등에 대한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신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의 답은 ‘그렇다’입니다. 톨스토이를 저는 그리스도인 형제라고 주저 없이 부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그를 파문한 정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단자는 불신자들보다 더 나쁘고 악한 사람 취급받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입니다. 하긴 톨스토이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단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나아가서는 바람직하기까지 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누군가가, 혹은 교회가 독점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교리는 중요합니다. 그것은 신앙 생활의 얼개를 이루어줍니다. 그러나 교리가 곧 진리는 아닙니다. 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교리는 실천하는 삶으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2,000년 역사는 믿음과 실천, 교리와 신자들의 삶 사이에 깊은 간극이 존재하고 있음을 노출해 왔습니다.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정립되는 과정은 기독교의 신비성, 이를테면 삼위일체론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신비적 요소를 논리화 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비적’인 것은 ‘논리적’일 수 없습니다. ‘신비적’인 것은 그저 ‘신비적’일 뿐 그것을 논리화 하려는 순간 서로 다른 다양한 견해와 주장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자들은 삼위일체 교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교리를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것은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신비성은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의 존재(하나님, 예수님, 성령님)를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경험함으로써 신자가 된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이성과 연구, 관찰을 통해 ‘진실성’을 확인하고 신자가 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두 부류의 경우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판단하려면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식하고 행동하는 분명한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여야 할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비록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거부하였지만 그 자신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에 신비한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가 이해한 대로 산상수훈의 말씀을 철저히 이행하고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을 일관했던 성경적 진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평화, 그리스도의 정의, 그리스도의 자유, 그리스도의 평등’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를 완전한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가 이해한 대로의 성경의 진리를 삶으로 실천한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인으로 칭송받고 존경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하였지만 여전히 그의 삶, 그의 신앙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광범하고 깊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톨스토이는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영감받은 이들의 내면에서 오늘도 부활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