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90)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90)
톨스토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를 신앙, 신학, 문학가, 삶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문학가로서의 그의 성취, 그에게 붙여진 “대문호”라는 존칭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세상에 대문호의 모습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톨스토이는 관심을 가진 사람 외에는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류 교회인 정교회측으로부터 파문당하여 비주류의 끝단으로 밀려나게 된 사정이 톨스토이의 신앙과 신학, 삶이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지 못하고 제한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톨스토이 그 자신에게서 신앙과 신학, 삶은 정연히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비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당대 쌍벽을 이루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과 톨스토이의 소설, 그리고 그 둘의 신앙과 신학을 비교해 보아도 어렵지 않게 그 둘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도스토에프스키는 정통신앙과 신학에 근거해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의 소설을 읽어보더라도 신학적 기본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 사이의 차이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죄와 구원”이라는 정통 신학의 교리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면 톨스토이의 관심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통찰과 실천”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1879년부터 1884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톨스토이는 문학서적이 아니라 신앙서적과 신학서적을 폭풍처럼 저술하고 출판합니다. 「참회록」을 필두로 「아무도 모르는 예수」(원제 The Gospel in Brief, 이동진역, 해누리기획, 2006년),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교리신학 연구」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10년 후 1994년에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를 출판합니다. 일찍이 정교회 신학자 플로롭스키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톨스토이는 신학을 철저히 이성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그 스스로도 명백히 밝히고 있듯이 그는 신앙과 신학의 신비주의적 요소들을 철저히 배제한 신학을 완성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예수」를 통해 우리는 성경과 신학을 대하는 그의 관점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복음서를 그 자신의 관점에 따라 신비주의적 요소가 있는 부분과 기적과 이적이 행해진 장면을 의도적으로 배격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 가능한 윤리적 지침과 삶의 지침으로 해석합니다. 그 해석에 근거해 예수의 일대기와 가르침을 재구성하여 기술한 것이 사복음서 요약판인 「아무도 모르는 예수」입니다. 비기독교인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아무런 의구심 없이 기독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독교인이 읽는다 할지라도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정통 교리”의 잣대를 가지고 이 책을 면밀히 분석한다면 필히 이 책이 “정통 교리”로부터 한참 일탈되었음을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인으로 분명히 확립하게 된 계기는 누구나에게 그렇듯이 회심을 경험하면서부터 였습니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회심 경험과 역사 속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회심 경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회심은 일종의 “이성적 통찰과 각성”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배우지 못한 러시아 농민, 농노들의 삶과 신앙을 통해 톨스토이는 당대의 귀족들과 지식인, 신부들의 신앙의 허구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을 신약성경의 산상수훈에서 발견합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톨스토이 생애 내내를 관통한 그의 신앙과 신학, 신념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기독교의 신비적 요소를 체험적으로알게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신비적 요소가 가미되지 않은 산상수훈의 명료한 가르침만으로도 톨스토이에게는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분별하고 이해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산상수훈의 말씀은 성경 전체의 요약이면서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신 명백한 계명이요, 삶의 지침이었습니다. 오히려 톨스토이는 제도 교회가 기독교의 신비주의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자신들의 허물을 감추고 일반 백성들의 신앙을 오도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경험과는 다르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심의 순간 “하나님의 현현”, “말씀의 울림”, “밝고 환한 빛의 출현” 등 다양한 형태로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 성령의 나타나심 등을 경험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과 의지를 넘어서 전개되는 신 존재와의 조우이며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였습니다. 신 존재를 경험하면서 인간은 자기 존재의 죄성을 발견하고 그분 앞에 무릎끓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어오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우리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곧 신비의 영역의 일인 것입니다. 그 신비로운 일은 그때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톨스토이가 부정한다고 해서 없어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신비적 영역을 톨스토이가 알지 못했고 그의 신앙과 신학의 영역에서 삭제해 버린 것은 못내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