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76)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76)
주지 하다시피 아나뱁티스트들은 크게 메노나이트, 아미쉬, 후터라이트로 나뉘어 집니다. 1525년 1월 21일 펠릭스 만쯔의 집에서 시작된 아나뱁티즘은 아나뱁티즘 신학의 대표자인 메노 시몬즈(1496-1561)의 이름을 따라 메노나이트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들보다 더 엄격한 제자도와 공동체 규율을 요구한 야콥 암만과 이들을 따르던 이들에 의해 1693년 스위스 알자스 지역에서 아미쉬 분파로 나뉘어 집니다. 이들 보다 조금 이른 1528년 모라비아 지역에서는 야콥 후터의 지도 아래 기독교인의 철저한 공동생활을 강조하는 후터라이트 분파가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철저한 제자도, 공동체, 평화라는 공통의 신앙과 신학을 고백하고 있지만 신앙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신앙공동체가 머무는 장소부터가 다릅니다. 메노나이트들은 주로 도시에 머무르고 있는 반면에, 아미쉬와 후터라이트의 생활기반은 농촌에 있습니다. 소유의 관점에서 보면 후터라이트는 공동소유, 공동생활을 강조하지만 아미쉬와 메노나이트는 개인(가족) 소유와 개인(가족) 생활을 인정합니다. (1948년 독립한 이스라엘이 건국의 기초를 세우면서 국민생활을 조직했던 키부츠가 공동소유, 공동생활을 지향한 반면 모샤부가 개인 소유와 개인 생활을 허용한 것과 같습니다.) 세상(세속)에 대한 관점도 서로 다릅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기본적으로 분리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메노나이트가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공동체를 추구한다면 아미쉬와 후터라이트는 세상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보다 엄격한 분리주의를 실천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들 신앙공동체의 로케이션이 도시냐 농촌이냐의 차이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기술문명의 수용 여부, 혹은 수용 정도의 차이도 현저히 다릅니다. 아미쉬가 기술문명의 수용에서 지극히 소극적이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 후터라이트는 기술문명의 수용에서 긍정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취합니다. 아미쉬가 전기, 트랙터의 사용조차 허용하고 있지 않은 반면에 후터라이트들은 인터넷과 핸드폰을 사용하고 트랙터와 같은 농기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의생활에 있어서도 이들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미쉬와 후터라이트가 공동체 의복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메노나이트는 이에 대해 자유롭습니다.
아나뱁티즘을 대표하는 세가지 키워드 “제자도, 공동체, 평화” 중에서 메노나이트, 아미쉬, 후터라이트가 큰 차이 없이 동의하는 개념은 평화일 것입니다. 위에서 기술한 이들 사이의 차이는 진정한 제자도와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실천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평화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물론 서로 다른 의견과 접근법이 있을 수 있지만 전쟁반대, 군대반대, 폭력반대를 통한 절대적 평화의 추구는 공통의 신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아나뱁티즘을 저의 신앙의 고백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가장 큰 장벽은 “평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평화가 길”인데 “평화에 이르는 길”을 어쩌면 인류는 수천년 동안을 찾아 헤메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화는 오직 평화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데 인류는 수천 년을 평화는 힘에 의해서, 무력에 의해서 지켜질 수 있다고 믿어 왔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어 온 것뿐만 아니라 그렇게 실천해 왔습니다. 그것이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의 본질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2,000년 동안 어거스틴에 의해서 정립된 “정당전쟁론”과 “정당방위론”을 부동의 신조로 알고 지켜왔습니다. 아나뱁티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믿고 있는 보편 신념을 거스르는 결단을 해야만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제 친한 친구 중에 여호와의 증인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 가족 중에 촉망 받는 큰 형이 있었습니다. 그가 군대 입대를 거부해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제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 당시가 “김일성이 남한에서 환갑잔치를 하려고 한다”는 루머가 돌던 시절이었으니 그 친구 형이 보여준 행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집단은 나라를 망치는 사람들이요, 애국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들이며, 이단의 무리들일 뿐이다 라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이래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습니다. 저는 지금도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다만 그들이 군대를 거부하고, 수혈을 거부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종교적 이단이나, 사회적 일탈자로 규정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에 대해서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의 사람의 모습을 사진이나 영상으로보았을 때의 저의 처음 반응도 그랬습니다. 아니, 저게 뭐야. 도대체 왜 저러고 살지? 하는 마음이었으니까요. 사회적 통념이 성서적, 신앙적 관점을 능히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깨어 있지 못한 것이었지요.
지난 주 공동체 가족의 결혼식이 있어 부안에 들렀다가 선유도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70이 훌쩍 넘어 보이는 두 쌍의 노부부가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르며 사진 찍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의 외형은 마치 아미쉬 사람들 같았습니다. 소박하고 촌스럽고 투박한 모습이었습니다.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르며 서로 사진 찍어주고 있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제가 자청해서 사진을 찍어 드렸습니다. 교회에서 오신 분들 같은데 어느 교회에서 오셨느냐고 묻자 자신들은 여호와의 증인이라 했습니다. 그 말을 드는 순간 제 마음속에서 따뜻한 형제애가 솟아났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들은 나의 형제요, 자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