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73)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73)
성령론도 기독교 조직신학의 중요한 한 영역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천덕 신부님의 성령론을 지지합니다. 그것은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인간 삶과 역사(歷史)에 때때로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님’으로 요약됩니다. 전자는 인간의 성품의 변화(神化)와 관련이 있고, 후자는 인간의 개인 삶과 인류의 역사 위에 함께 하시는 성령의 다이나믹스, 곧 권능과 능력과 관계합니다. 전도하고 선교할 때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성장할 때 특히 강조한 것은 전도와 선교였습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60,000여 교회가 세워졌고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을 정점으로 기독교 인구는 감소하고 있고 사회적 영향력은 현저히 추락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합당한 전도와 선교 전략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그 답은 2-3C 초대 교회와 기독교 전래기의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확산 과정에 답이 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오늘의 문제에 대한 답이 과거에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사도행전의 시대, 바울의 시대를 지나면서 AD 200-300년에 이르는 200년 동안 초대 교회는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교회는 적극적으로 전도하고 선교하지 않았다고 엘런 크라이더는 말합니다. 그 시기는 기독교에 대한 로마 당국과 사회의 핍박이 계속되어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고 발본하는 환란기였기에 기독교는 전도하고 선교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어 교회 예배에 출석하기 위해서는 3년의 준비 기간과 관찰 기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기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생명의 위협과 재산의 몰수와 같은 극한적인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 기독교는 핍박을 뚫고 끝없이 성장하고 확산되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매력은 기독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여주는 그들의 성품과 삶의 태도를 통해 발산되었다는 것입니다. 거친 핍박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소망을 잃지 않고 선을 행하고 이웃을 돌보며 자기 것을 나누고 베푸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고, 그들의 인품을 보고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저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동력삼아 초대 교회는 성장하고 확산되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신앙과 믿음의 외적 표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믿음은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고결한 윤리적 삶으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 교회가 성장하고 흥왕한 전도와 선교의 비결이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침체기로 들어선 지금, 여전히 우리에게도 답은 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답이 있습니다. 16C 종교 개혁시기에 아나뱁티즘 선배들이 초대 교회에서 답을 찾았던 것처럼 우리도 거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복원(restoration)되고 회복(recovery)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시겠다 말씀하셨고, 자신의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신의 삶 속으로 부르셔서 그들과 삶을 함께 하시고 나누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성품을 닮아 가게 하셨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만큼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생활화하고 있는 사람들은 달리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받게 된 사람들, 곧 구원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된 성품, 죄인된 성품이 의로운 성품과 의로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의 성품에 대한 강조는 그들의 겔라센하이트(Gelassenheit)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아미쉬 사람들에게 있어서 겔라센하이트(Gelassenheit) 는 “겸손, 순종, 인내”의 품성과 “평온, 수용, 양보”의 태도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그들의 삶과 신앙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정신입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눅 9:23)의 말씀을 따라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공동체의 뜻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며 이를 일상 가운데서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가장 헌신적이고 신실하고 유익한 기독교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유익과 욕망을 희생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철저한 헌신을 자발적으로 하는데 이 결단은 성인 침례식에 의해 확인됩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관수례 형식의 침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죽는 날까지 이 결심을 변치 않을 것임을 교회와 약속합니다.
도널드 B 크레이빌과 몇몇 학자가 공저한 「아미쉬의 신앙과 문화(The Amish)」에서 크레이빌은 이 단어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산드라 크랑크(Sandra Cronk)가 1977년의 박사 논문에서 처음으로 겔라센하이트를 올드 오더 공동체의 중심되는 정신으로 확인하면서부터 라고 말합니다. 도널드 크레이빌도 이 개념에 근거해 아미쉬 사회와 문화를 해석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크레이빌은 프랑스 사회학자 보르디외에게 감사함을 표하는데 그의 아비투스 개념이 아미쉬 사람들의 겔라센하이트와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엘런 크라이드로부터 인용한 아비투스 개념을 하비 콕스가 시장 신에 함입당한 현대인의 아비투스로 설명하더니, 도널드 크레이빌은 아미쉬 사람들의 겔라센하이트를 그들의 아비투스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