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69)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69)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해 연구하게 된 동기에 대해 “우리가 의도하는 것은 수많은 역사적 개별동기에서 성장한 근대의 특수한 ‘현세’지향적 문화의 복잡한 발전 과정에서 어떠한 종교적 동기가 일조했는지를 좀 더 분명히 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현세지향적 문화는 곧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인데 그는 자본주의와자본주의 정신에 대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정신과 태도”,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에 의한 이윤 추구, 그리고 영원히 ‘재생되는’ 이윤의 추구” 등으로 정의합니다. 이 말을 요약하자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지속적이고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현세지향적 체계와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베버는 18C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산업자본주의가 이전의 전통적 사회 문화, 경제 체제와 비교해 구별되는 특징을 ”현세지향성“과 ”이윤 추구“에서 찾습니다. 유럽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현세 보다는 내세를 지향하는 성향이 있었고, 이윤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자를 취하지 말라(출 22:25, 레 25:35-37 , 신 23:19-20)는 율법을 일상적 경제 생활에 적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버는 일례로 ’성과주의‘에 대한 당시 노동자 계급의 반응을 전해줍니다. ’성과주의‘를 택하여 적용하려 할 때 노동자들은 더 많은 노동을 통해 얻는 잉여수입 보다는 노동을 적게 하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본성상’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기보다 단지 자신이 살아온 대로 살고 그에 필요한 만큼만 벌려고 한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제 생활에 대한 자본주의 이전 시기의 전통주의 태도인데 자본주의는 이러한 전통적 정신, 전통주의적 관점과 태도와 결별 하여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새로운 유형의 기독교인들이 역사의 중심에 대두되는데 그들이 바로 칼빈주의적 신학과 신앙으로 무장한 기독교 중산층 부르조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청교도, 아나뱁티스트, 감리교도, 경건주의자, 퀘이커 교도 등의 신학은 서로 달랐지만 이들의 윤리와 삶이 자본주의의 생성과 발전에 칼빈주의자들과 똑같은 영향을 끼쳤다고 베버는 주장합니다.) 베버가 보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召命, vocation)으로 받아들이고 – 영어 단어 vocation은 직업의 의미와 소명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곧 직업이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 주어진 현실의 삶에 충실하였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에 따라 선택받고 구원 받았다고 믿는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했고, 그러한 삶이 내세에서의 상급을 보상받는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직업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그들은 숙련된 노동자, 기술자가 되었고, 상인들은 합법칙적 경영 기술을 습득하여 자본주의의 중심축을 이루는 부르조아 시민계급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게다가 그들의 경건한 신앙은 ‘청빈(금욕)의 삶’을 지향하게 하였는데, 성실한 삶을 통해 축적된 자본을 그들은 낭비하지 않고 산업에 재투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번성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윤을 목적으로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노동과 직업 자체를 신성시 함으로써 이윤을 축적하게 되었고 축적된 자본을 청빈의 윤리에 따라 소비하지 않고 다시 산업에 재투자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와 질서를 구축하는데 일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목적으로서의 부의 추구를 비난받아야 할 최악의 것이라 보면서도 직업 노동의 열매인 부의 획득은 신의 축복”이라고 보았고, “기독교적 금욕의 정신에서 근대적 자본주의 정신, 그뿐 아니라 근대적 문화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직업 사상에 입각한 합리적 생활방식”이 탄생하였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세속을 벗어나 고독으로 도피했던 기독교의 금욕주의가 이제 수도원에서 나와 세상을 기독교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는데 그 금욕주의는 삶의 시장에 걸어 나와 현세적 일상 생활에 자신의 방법을 침투시켰고 일상 생활을 세속 안에서 – 그러나 세속에 의해서나 세속을 위해서는 아닌 – 합리적 생활로 변형시킴으로써” 산업자본주의의 기반을 단단히 구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버와 마르크스는 공히 사회학자들이었기에 신흥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를 전망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발전하고 결국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대체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의 전망은 틀렸습니다. 오히려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는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물론 마르크스의 역사 전망과 예측, 그리고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실험은 실패로 드러났지만 자본주의의 모순과 여러 문제들에 대한 그의 분석마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베버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기독교 윤리에 의해서 탄생된 자본주의의 미래를 전망합니다. 새롭게 형성된 자본주의 질서는 그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생활 양식을 “압도적인 강제력”으로 규정하여 벗어버릴 수 없는 “강철 같은 겉껍질”이 되어지리라는 것을 예견합니다. 그때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신 없는 전문가, 가슴 없는 향략자”가 될지 모른다고 전망합니다. 그도 마르크스와 같이 “강철 껍데기” 비유를 통해 자본주의의 합리적 체계가 인간을 도구화 하고, 자신이 만든 시스템에 스스로 갇혀 자유를 잃고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을 예견합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체계와 구조만 남고 그것을 만든 원래의 정신과 윤리는 사라질지 모른다고 예견합니다. 당시의 탁월한 설교가 백스터(Baxter)는 “외적인 재물은 성도에게 가벼운 망토처럼 어깨 위에 걸쳐져 언제든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자본주의 체계와 구조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이미 벗어 버릴 수 없는 망토 -“강철 껍데기” - 에 갇힐지 모른다고, 아니 그 징조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베버는 진단합니다. 베버의 우려는 슬픈 현실이 되었고 찰리 채플린은 그 냉혹한 현실을 무성 영화를 통해 슬프디 슬픈 몸짓으로 풀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