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64)

라파공동체2026.03.28 15:233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64)

 

<생태신학(Ecological Theology)>은 자연과 창조세계, 생태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 신학의 한 분야입니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과 산업 문명이 초래한 생태 위기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찰하고,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생태 회복에 기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생태신학은 “자연”을 더 이상 단순한 자원이나 배경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식합니다. 이는 전통적인 신학이 간과하거나 왜곡해온 자연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조명합니다.



<생태신학>에 대해 알기 위해서 스티븐 보우머 프레디거가 쓴 「주님 주신 아름다운 세상」(김기철 역, 2011, 복 있는 사람)을 교회 식구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얻은 통찰도 참으로 귀한 것이었습니다. 프레디거는 이 책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눈으로, 다시 말해 성경의 생태학적 지혜를 볼 수 있는 눈으로 성경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가 현재의 생태계 위기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고발합니다. 그 통렬한 고발의 첫걸음은 성경 해석의 오류에 대한 지적으로 시작하는데 그 본문은 창세기 1:28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핵심 단어가 정복하다 (kavash) 와 다스리다(radah)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는 이 구절과 단어들을 인간이 우주의 중심, 만물의 영장인 양 받아들여 식물과 동물, 자연 세계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과 착취를 정당화, 합리화 함으로써 총체적 환경 위기를 불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 통렬한 지적에 저도 찔림을 받았습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저 역시 그 두 단어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단어를 자연 세계를 포함한 피조 세계 전반에 대해 인간의 우위성을 당연시하고 이들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대상으로 객체화하며, 내면의 공격성을 정당화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 각 구절과 단어들은 새로운 빛 가운데서 조명되어야 하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주님 오실 그날까지 그때그때 조성되는 환경 가운데서 끊임없이 해석되고 재해석 되어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프레디거는 이 말씀을 창 2: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의 말씀과 연관하여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기서의 “다스리며 지키게”의 단어도 “섬기며 돌보게”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스리며로 번역된 단어는 아바드(āvad)인데 이 단어는 ‘경작하라’, ‘섬기라’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제사장이 성소를 ‘섬기다’ 할 때도 사용된 단어이기도 합니다. ‘지키라(šāmar)’는 보호하다, 돌보다는 의미로, 하나님이 율법을 보존하고 준수하는 것을 말할 때 쓰는 단어이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인간이 에덴 동산을 착취하거나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봉사하고 보호하는 주체이며 인간은 자연세계에 대해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섬기고 돌보는 청지기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복은 책임을 전제로 하며, 다스림은 섬김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8의 "정복과 다스림"은 창세기 2:15의 "섬김과 보호" 속에서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연을 섬기고 가꾸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레디거의 말대로 인간(아담)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 대로 땅(아다마)을 경작하고 섬겨야(아바드)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프레디거가 선사해 주는 종말 세상의 비전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것은 희망적이며 아름다웠고 찬란했습니다. 생태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종말론을 언급하기 위해 프레디거는 베드로후서 3장의 말씀을 대표적인 반생태계적 종말론을 불러 일으킨 오용된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3:10)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3:12)

     

베드로후서에 대해서 여러 나라의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종말의 날, 주님 재림의 날에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불에 타 사라질 것이다” 수준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불타 사라진다”(καυσούμενα, kausoumena)는 번역은 일부 사본에서만 등장하며, 많은 중요한 사본에서는 “드러난다, 또는 발견된다”라는 의미의 유레쎄세타이(εὑρεθήσεται)로 표기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단어에서 ‘발견하다’는 의미의 영어 단어 유레카(eureka)가 파생되었습니다. 다른 사본을 적용하여 번역한 새개역표준성경(NRSV)에 따라 이 구절은 “땅과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그날에)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로 번역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 본문은 심판자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불로 태워 정결케 한 후에 불타 없어지지 않을 새로운 땅이 드러나게 되리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뱅을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의 주해를 소개하면서 프레디거는 이 구절은 종말의 그 날,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과 심문을 당하여 정결케 된 후에 이어 지는 13절의 말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도다”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종말의 날, 대심판의 날에 지구는 파괴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으로 새롭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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