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58)

라파공동체2026.03.28 15:242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58) 

    

 “예배”와 “구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개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두 개념은 심각하게 왜곡되고 훼손된 채 인식되고 실천되고 있습니다. 흔히 “진정한 예배”를 “구원의 감격이 있는 예배”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구원받은 자들이 구원자께 드리는 감격의 예배”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구원받은 자, 곧 신자가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또한 예배는 일상 속에서,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사라지고, 주일에 한 번 모여 치르는 종교 의식(ritual)으로 축소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예배가 아닐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바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곧 하나님을 기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타인의 본이 되는 삶 전체가 예배인 것입니다.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일종의 공적 예배 의식에 가까운 형태일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으로서의 예배’는 실효성이 없는 추상 개념처럼 여겨지고, 실제로는 주일 공예배만이 예배의 전부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대세입니다. “예배”라는 단어가 본래의 의미를 잃고, 오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론”은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 교리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어,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강조하지만,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과 행함은 철저히 경시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믿음과 행함 사이에 깊은 간극이 형성되어 버렸습니다. 행함을 강조하면 으레 ‘행위 구원’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행함이 따르는 믿음”의 중요성이 약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루터가 “이신칭의”를 강조하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주장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폄하한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 물론 루터가 카톨릭의 ‘공로 중심 구원’에 맞서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하며 종교개혁을 이끈 공로는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야고보서”가 경시된 것은 분명 루터 신학의 약점입니다.



 믿음과 행함, 구원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2:8-9은 이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구절은 구원의 근거가 ‘은혜’에 있으며, 믿음은 구원의 ‘통로’임을 명확히 밝힙니다. 사람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어떤 상태로부터 구원받은 것입니까? 죽음, 죄, 절망, 억압, 좌절의 상태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받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만남, 영의 세계로의 초대, 죄의 형벌에서의 사면, 하나님의 자녀됨, 백성됨, 그리스도의 제자요 종이 됨,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음, 새 사람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남 등 다양한 차원에서 구원은 정의될 수 있습니다. 구원은 크게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측면: 법적(칭의), 관계적(화해), 영적(중생), 윤리적(성화), 종말적(영화), 구속적(희생), 언약적(계명 순종), 그리고 하나님 나라로의 진입 측면

사회적 측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정의와 평화의 실현, 공동체의 회복과 화해



 누가복음 8장에서는 예수님의 구원 행위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거라사의 군대 귀신 들린자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시면서, 18년 혈루병 앓던 여인을 고쳐주시면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시면서, “구원”이 너희에게 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구원은 인간과 사회, 역사 속에서 다양한 양태로 나타납니다. 또한 구원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미와 아직 사이”라는 신학적 명제는 구원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으나, “아직” 구원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신앙의 기초를 이루는 언어와 핵심 개념들이 본래 의미에서 벗어난 채 오용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신앙의 앞뒷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둘이 분리되어 작동하고 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인데도, 많은 이들이 주일 공예배가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구원의 다양한 측면은 무시된 채, 개인의 내세 보장이나 형통의 보장으로 축소되어 이해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으면 다 된 것처럼 여기는 현실은, 그리스도인의 뿌리가 썩고 병들어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기독교의 뿌리가 썩고 병들었기에,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새로운 언어를 사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앨런 크라이더의 말처럼,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아비투스”가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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