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51)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51)
11. 교회당 건물과 건축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교회를 구약시대의 성전과 동일시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당 내부도 카톨릭 성당이나 구약시대의 성전을 본따 성소, 지성소의 개념을 적용하여 교회당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지어진 강대상은 지성소이므로 일반 신자가 감히 올라가서는 안되는 성스러운 금단의 구역이었습니다.
12. 성직제도가 버젓이 부활하였습니다. 본래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신교의 종교개혁은 성직제도를 부정하고 “만신자 제사장주의(전교인 목회자주의)”를 표방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성직자로 인식되고 있고 일반 교인은 이에 대비되어 평신도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강대상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가듯이 성직자만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3. 세속적 지위와 신분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통용되었습니다. 사회적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인양 받아들여지고, 그들의 믿음은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주요 직책을 차지함으로 교회가 세속적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었습니다.
14. 대부분의 교회가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무관심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면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하고, 세상의 필요를 찾아내어서 어두운 곳에는 빛을, 맛을 잃은 곳에는 소금을 치고, 부패한 곳을 밝게 하고 치유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세상 일에 무관심하였습니다. 혹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그 영역이 지극히 편협하여 사회로부터의 고립과 지탄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15. 교회와 사회(국가)와의 관계 설정이 왜곡되고 잘못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사회에 대해 대안적, 대항적, 대조적인 특성을 잘 견지하여야 했지만 그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항하지 않아야할 영역에서 대항하기도 하고, 대안적이어어야 할 때 동조적이며, 대조적이어야할 때 오히려 세상에 순응적이며 동화적인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교회의 사회(국가)에 대한 태도는 지극히 왜곡되고 모순되어 있어 뒤죽박죽의 혼돈 가운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 교회가 시대정신을 따르거나 선도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시대정신에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한 측면은 긍정적인 측면으로서 교회가 따르거나 선도해야 할 정신이고, 다른 측면은 부정적인 측면으로 교회가 멀리하거나 대항하여야 할 정신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성경에 반하는 부정적인 시대정신에 편승, 동화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현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시대정신은 극단적 개인주의, 효율성의 추구,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데 교회도 이들 가치에 동화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 가치와 정신과는 결단코 부합할 수 없는 기준들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추구해야할 긍정적 시대정신은 공동체, 배려, 나눔, 평화와 같은 가치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강함이 아니라 연약함을 추구할 때 실현할 수 있는 가치들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거룩성의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을 잃은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됩니다. 교회가 교회답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되는 표징을 드러낼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해 대안적, 대조적, 대항적 성격을 갖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교회다움의 표징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도 그러한 성격을 선연히 드러낼 때 가능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마치 한국 사람이 미국에 있어도 미국에 속하지 않고 한국에 속한 사람인 것처럼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교회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외국에 있는 대사관과 같습니다.(바울은 고린도 후서 5:20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 나라의 대사(사신)로 표현합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은 한국 법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법이 적용되는 치외법권 지역이듯이 세상 속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 있어 이 세상의 법을 따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법, 곧 성경의 법을 우선적으로 따릅니다. 세상의 법과 풍속, 윤리와 가치가 하나님 나라의 그것과 다를 때 교회는 세상의 것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것을 따릅니다.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탁월성과 완전성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세상 것과 비교해 비할 바 없는 탁월성과 완전성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저열하고 불완전한 것을 뒤로 하고 탁월하고 완전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할 신자들이,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하나님의 것보다 세상의 것을 더 좋아하고 따르려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의 것을 따르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과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세상 것에 비해 비교할 수 없는 탁월성과 완전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고 실현하기가 너무 힘들어 그냥 세상 것을 따르며 편하게 살기를 결정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바른 신자, 의로운 신자로 살아 가는 것, 그런 교회를 이루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한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라고 권면했을 때, 이는 이미 초대 교회 당시에도 하나님의 것, 하늘의 것보다 세상과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교인들이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부터,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한 때로부터 세상과 교회 사이에는 늘 긴장이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잘 훈련되어 세상 풍조를 거슬러 살아가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야 하는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