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39)

라파공동체2026.03.28 15:242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39)  



 저의 신앙생활 초기 3년은 바울의 아라비아 3년과 같았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대해서 배우고 새로운 경건생활, 신앙행습을 익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개인 경건생활에 힘쓰고 교회생활을 배우고 즐기며 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그리스도인 혹은 그리스도인 인간이라는 독특한 유형의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기독교인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 기독교인의 삶이었는데 그 과정은 철저히, 전적으로 신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것은 신과 인간에 대해서 더 잘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신론과 인간론을 재정립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특히 중독자 치유사역을 해오면서 개신교 신앙과 신학에서 특히 부족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론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잘 아는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창조물인 “인간(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무지한 것이 현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神學)이 신인학(神人學)으로 확장되든가, 아니면 적어도 신학과 인간학에 대해 균형 있는 가르침이 신학교나 교회의 교육 과정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독 치유 혹은 성경 교육의 한 방법으로 “비블리오 드라마”가 있습니다. 싸이코 드라마나 소시오 드라마처럼 역할극을 통해 성경을 깊이 있게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배우기 위해 비블리오 드라마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사사기의 삼손 이야기를 주제로 드라마를 시연할 때였습니다. 모임 참석자들이 삼손의 일대기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표현하며 공동작업을 하였고 마지막 장면이 삼손이 어린 소년의 손에 이끌려 눈이 먼 상태로 블레셋 성전에 이끌려 나온 순간을 연출할 때였습니다. 드라마를 인도하는 디렉터가 그 상황을 고정시킨채 참석자들을 삼손의 엄마로 분하여 블레셋 성전에 이끌려 나온 삼손에게 – 적들에게 눈을 뽑히고 이제 곧 죽을 처지에 놓인 아들 삼손에게 – 어미의 심정을 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거기에는 목사, 수녀, 평신도, 교회 권사 등등 여러 분들이 참석하고 있었는데 나이 지긋하신 개신교 여자 권사님 둘이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의 차례가 되어 삼손에게 말할 순서가 되었는데 그분들이 한 말이 참으로 기막혔습니다. “그러길래 엄마가 뭐라고 그랬니. 하나님 말씀 안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고 그랬지!” 저는 이 말, 그들의 태도를 평생 잊지 못합니다. 기독교가, 기독교인이, 율법이, 말씀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야만적이 될 수 있는지를 그때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다른 두 명의 카톨릭 수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엄마의 마음이 찢어지는구나. 내가 너를 대신할 수만 있다면......아들아, 내 아들아!” 너무 대비되지 않나요? 자식이 눈이 뽑힌 채 비참한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 자리에서 개신교 권사님들이 툭하고 내뱉은 말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발언이 아닌가요? 여러분들이그 자리에 있었다면 뭐라고 말을 해 주겠습니까? 참으로 끔찍한 것은 그 권사님들의 발언과 행동이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태도일 가능성이 크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 자신의 태도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개연성이 제 안에 너무 쉽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리상담학 공부를 통해 훈계하기, 조언하기, 지적하기, 충고하기, 동의하기, 봐주기, 비판하기 등등은 상담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일상을 살아가면서 대인관계에서 제가 반응하고 행하는 태도는 거의가 비판하기, 조언하기, 충고하기, 훈계하기 등 이었습니다. 주의해서 듣기, 수용하기, 인정하기, 칭찬하기, 공감하기, 고백하기와 같은 자질이나 기능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중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일 것입니다. 한 인간의 변화, 인격과 성품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을 때, 곧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성품화가 되지 않을 때 오히려 계명과 율법이 억압이 되고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위의 사례는 명확히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고 영의 세계에 초대되었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수련에 힘쓰며, 바른 세계관을 정립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아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바른 길,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