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32)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32)
제가 아나뱁티스트가 되는 과정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같이, 인생 길이라는 것이 의례 그러하듯이 끝없이 배우고 변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더 정확히는 주님이 저를 찾아와 주시기 전까지 제 인생의 근본 주제는 인간이란 누구이며,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무얼 위해 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질문들이겠지요.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사람마다 그 질문들에 얼마나 진지하게 반응하느냐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일 것입니다. 대체로 저는 진지하게 반응하는 인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제 인생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그것은 36세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마치 인류 역사가 BC(Before Christ)와 AD(Ano Domini), 즉 주님 오시기 전과 후로 나뉘는 것처럼 제 삶도 꼭 그와 같아서 주님이 오시기 전과 후로 확연히 구별됩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 제 인생에서 중요했던 개안의 두 시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시기는 인간의 사상(思想)에 눈뜨고 사상에 이끌렸던 20대 30대 초반의 12-3년의 시기였고 두 번째는 기공수련을 통해 불교를 알게 되고 종교에 입문한 30대 초중반의 2-3년간 이었습니다. 인간은 사상을 만들고 사상은 인간을 움직입니다. 사상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크게 사상사(思想史)와 기술사(技術史)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양자의 역사는 인간의 자유·정의·평등·평화·복지·인권의 확대와 강화를 위한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종교 역시 인간과 인간 세상의 자유·정의·평등·평화·복지·인권의 확대와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사상사는 또한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사상사와 종교 중심의 종교사상사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고, 종교사상사는 다시 인본주의 종교사상과 신본주의 종교사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저의 인생은 인본주의 사상을 믿고 따르며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불교를 통해 종교의 세계에 입문했지만 불교의 사상도 제게는 인본주의 종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 문명과 종교문명의 사상사는 인본주의적 사상사와 신본주의적 사상사로 대별될 수 있는데 제 세 번째 개안은 신을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인본주의 사상에서 신본주의 사상으로의 전면적 변혁을 동반하는 것이었는데, 제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황홀한 영적 세계로의 초대였습니다. (사실 참된 신본주의는 참된 인본주의로 발현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는 결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 두 개념이 기독교 안에서 얼마나 오용이 되고 있는지요.)
특정 사상을 믿고, 이데올르기를 믿고 따르던 시절 그것들은 저의 이성에 근거한 결정이었고 행동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성을 믿었고 인간의 양심과 도덕을 믿었습니다. 이후 참선을 하면서 제가 발견한 세상은 이성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자기중심성이라는 인간의 본성이었습니다. 이성은 때에 따라서는 악의 본성의 발현을 합리화 해주는 비합리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그때 알았습니다. 인간의 이성 안에는 비합리성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선을
통해 자기 자신을 관(觀)했을 때의 그 눈은 이성의 눈 그 이상이었습니다. 마음의 눈이었다고말할 수 있을까요. 그랬던 제가 이번에는 신을 만난 것입니다. 육신의 눈과 귀로 그 분을 보고 들을 수는 없지만 영의 눈과 귀가 열리면서 저는 그분을 보고 듣게 된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저는 우리에게 삼중의 눈과 귀가 있음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육의 눈과 귀요, 둘째는 마음의 눈과 귀이며, 셋째는 영의 눈과 귀인 것입니다.
1995년 여름, 신이 제게 찾아오십니다. 제가 신을 만납니다. 천지를 지으셨다는 그 분을 만납니다. 파스칼이 만났다는 그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제가 만납니다. 경천동지할 일대 사건이 제 인생 가운데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돌들이 일어나 소리칠만한 일대 사건이, 제 상상 속에서조차 짐작할 수도 없었던 일이 제 인생 가운데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신을 만났습니다! 신이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신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다같이 이 신을 따릅시다! 저는 세상 가운데, 동네방네 떠드는 자가 되었습니다. 떠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신은 정말 계십니다! 멀쩡히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 곁에, 당신 곁에, 이 세상 가운데, 우리의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며 우리 곁에 계십니다! 외치고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 속에서 사울이라는 젊은이를 알았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젊은이가 예수쟁이들을 탄압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도중 홀연히 빛으로 나타난 예수를 만나 회심하고 크리스천이 되어, 그의 제자가 되어 온 세상 천지를 돌아다니며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던 그의 이야기가 바로 저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바울이 전도하던 시절은 사람들이 그를 아레오바고 광장에 세워워 저게 무슨 말인가 하며 경청하던 시절이었다면 지금은 신의 죽음이 선포된 시대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의 역서 「신의 역사」에서 그녀가 갈파했던 바, 현대는 인간에 의해 신의 죽음이 선고된 시대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신을 만났다고 외쳐도 의미있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신 존재를 논증하였지만 돌아온 반응은 너나 잘 믿으세요 였습니다. 하긴 뭘 어쩌겠습니까? 그들의 모습이 신을 만나기 전의 제 모습이었으니까요. 바울이 자기를 반대하던 사람들 앞에서 발의 티끌을 털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나아갔듯이 저도 전도의 미련을 털고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인도받은 땅은 중독의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꼭 필요한 사람들은 중독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 기독교인으로서 공생애를 살아가기 전까지 저도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 청년과 같이 아라비아와 다소에서의 5년의 생활과 수련시간을 거쳐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