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23)

라파공동체2026.03.28 15:243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23)



 토마스 뮌처와 루터, 그리고 아나뱁티스트 사이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과거를 재해석하는 것 뿐만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용하기 위해서 더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다니엘서 2장을 주제로 행해진 뮌처의 설교를 눈 가리고 듣게 한 후 그것이 누구의 설교인지를 분별하게 한다면 루터의 설교인지, 토마스 뮌처의 설교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전 정보가 없다면 카톨릭 체제에 반대하는 루터의 설교로 보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강조가 다소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루터도 주의 만찬에 대해 화체설을 주장할 만큼 신비주의적 요소를 그의 신앙 안에 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설교를 루터의 설교로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루터의 신학과 신앙이 뮌처의 신학과 신앙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현대 아나뱁티스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확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무력을 사용해서 카톨릭에 반대하고 저항했습니다. 뮌처는 무력을 사용해서 루터와 영주 및 귀족세력에 반대하고 저항했습니다. 루터는 뮌처의 농민군에 맞서 무력으로 봉건영주국가를 지키려 했고, 뮌처는 무력을 사용해 봉건영주국가를 친농민적, 친노동자적 국가로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루터는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농민혁명군에 대항하여  「살인마 도둑떼 농민들에 맞서」 라는 격문을 발표합니다. 이 때 루터가 인용한 성경 말씀이 “칼을 가진 자 칼로 망한다” 였습니다. 그리고 그 칼을 든 농민들을 – 루터는 그들을 미친개에 비유했는데 – 영주 귀족 세력이 칼로 무자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 말씀에 어긋난 행동을 일삼아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으므로 그 누구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지요. 그 때 루터가 인용한 신약성경 구절은 로마서의 세상 권세에 순종하라는 말씀과 함께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였습니다. 주님도 세상 권력을 인정하셨는데 이 무지한 도둑떼 농민들은 주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세상 권력과 권위에 도전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토마스 뮌처가 이끌던 농민군이 당시 영주들에게 요청한 것은 1525년 

농민봉기의 중심지였던 슈바벤에서 발표한 12개 정강이었습니다. (「프라하 선언」(토마스 뮌처, 안성현 역, 도서출판 대장간, 2024년) 해제 참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목사는 복음에 인위적인 내용을 첨가하지 말고 간단하고, 곧고, 투명하게 전해야 한다.

2. 목사는 대십일조에서 사역의 대가를 받는다. 소십일조는 폐지한다.

3. 농민을 농노처럼 취급하지 말라. 우리는 자유인임을 선언한다.

4. 가난한 사람에게 짐승, 새, 물고기를 잡을 자격을 부여하라.

5. 귀족이 독차지한 숲을 마을에 환원하라.

6. 농민에게 부여하는 과도한 부역의 양을 축소하라.

7. 귀족은 농민의 동의 없는 부역을 부여하지 말라.

8. 공정한 지대를 책정하라. 헛된 노동에 동원하지 말고 일당도 빠짐 없이 지불하라.

9. 법령의 제정은 성문화 하라. 임의로 판결하지 말라.

10. 귀족이 도용하고 있는 마을의 공유지를 농민들에게 되돌려 달라.

11. 사망세(죽은 자에게 매겨진 세금)를 완전 폐지하라.

12. 여기에 나열된 주장 중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폐기하겠다.



 당시 도탄에 빠진 가여운 독일 농민들의 소박한 주장이 눈물겹지 않습니까? 12번째 주장에서는 그들의 신심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열한 가지 주장 중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폐기하겠다고 호소하지 않습니까? 이들의 요구 중 버릴 것이 도대체 뭐가 있습니까? 뭔 신성모독이 있으며, 뭔 반역이 있습니까? 이 주장을 한 농민들을 10만명 이상 살해할 권리가 과연 누구에게 주어졌단 말입니까? 인류 역사에 대한 보편적 해석의 차원에서든 기독교인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차원에서든 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뮌처에게는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비록 루터가 종교개혁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장본인으로서 그가 인류 문명과 기독교 문명에 가져온 혁혁한 공로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뮌처 대 루터의 문제에 관한 한 문제가 있다면 귀족 편에 서서 가난한 농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잔혹하게 죽인 루터에게 더 있다고 할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제게 이 두 사람 중 누구 편에 설 것인가를 묻는다면 주저 없이 저는 뮌처 편에 설 것입니다. 가난한 농노와 농민 편에 설 것입니다. 다만 현대 아나뱁티스트의 관점에서 볼 때 뮌처와 루터는 평화의 아나뱁티즘 반대편에 서 있는, 칼을 도구로 사용해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기에 이 두 사람 중 어느 편에도 설 수 없습니다. “칼을 가진 자 칼로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고 이를 삶으로 실천한 평화의 사람, 메노 시몬즈 편에 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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