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3)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3)
아나뱁티스가 되는 길에서 가장 큰 장애는 단연코 “두려움”이었습니다. 찍힐 것에 대한 두려움, 짤릴 것에 대한 두려움, 왕따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매장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등. 이 두려움은 한 개인의 내면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세대전수된, 칼융이 말하는 바 집단적, 무의식적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일제 식민시대를 지나고 격렬한 좌우 대립과 한국전쟁의 참상을 겪었으며, 개발 독재 시대의 억압을 경험한 한국인들에게는 세대를 이어 전수된 유전자화된 집단적 성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앨런 크라이더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인의 아비투스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동의되지 않은 소수의 권력이 힘과 폭력으로 압력을 행사할 때 대다수 연약한 자들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내재하게 됩니다. 자유를 위해 저항하려 하거나, 저항하는 자에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항하다 잡혀 고통을 당하는 사람보다 그 사람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가 더 크다는 것을 심리학적 연구결과는 증명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진정한 자유를 온국민이 마음껏 호흡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민주체제가 들어선 이후였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국가적, 사회적, 개인적으로 억압과 눌림의 기제는 여전히 작동되고 있습니다. 국가와 사회, 개인의 아비투스가 더 변화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12.3 계엄사태 이후 작금의 상황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내 의견을 말하고 서로 경청하며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민주의식이 한 개인의 성품으로, 제도로, 국가 운영원리로 작동하기까지는 우리는 먼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 정도가 정치적 형식을 만족시키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더 깊은 민주화 진전을 촉구하는 김누리 교수는 정치 민주화를 넘어 경제 민주화, 교육 민주화, 문화 민주화, 일상 민주화로 민주화 영역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종교 민주화, 교단 민주화도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교회야말로 세상에 대해 민주주의 성취의 모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치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성취된 단계에서도 억압과 강제의 매커니즘이 전 사회적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이유의 하나가 민족적, 역사적 트라우마에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 트라우마를 벗어던지지 않는 한 한국인 모두는 서로에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 굴레를 벗어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극단적 힘과 패권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던 후기 자본주의 체제 – 그것은 정보화 사회와 금융자본주의로 대표되는데 - 로 들어서면서 더욱 강화됩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스트롱 파워를 추구하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무한경쟁의 장이 전지구적 차원에서 항상적으로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은 다윈이 무덤에서 일어나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자연계 뿐만아니라 인간계의 생존원리라고 선포하는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현대 기술문명은 그에 걸맞는 사상과 원리 – 무한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 –를 만들어냈습니다. 기술문명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는 현대사상은 김누리 교수의 표현대로 이토록 “야만적”인 사상이 되었습니다. 본래 “문명”이라는 단어는 동양에서는 문자와 예술을 기반으로 한 깨달음과 교양을 갖춘 사회로 도덕과 윤리, 품성을 중시하는 사회를 의미했으며, 서양에서는 문명(Civilization)은 라틴어 civitas (도시, 시민 공동체)에서 유래한 것으로 법과 제도 아래 조직된 시민사회를 뜻했고, 도시화, 법률, 과학기술, 경제 시스템, 예술 및 문화의 발전을 포함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양자 공히 문명을 야만(Barbarism)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21C 현대 문명국가가 지향하는 사상이 “야만적”인 것으로 회귀하고 퇴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적 견지에서 볼 때 때때로 인간은 영적, 정신적 퇴행의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상황을 잘 극복하고 곧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오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만성이 되어 치유하기 어려운 고질병자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다른 현대 문명의 이 “야만적”이고 “야수적”인 퇴행 상태를 우리는 되돌릴 수 있을까요? 교회는 이 시대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다윈은 상대적으로만 옳습니다. 전적으로 옳은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지구생태계, 자연생태계가 서로 돌봄과 상호의존, 공생의 조화로움이 평화 가운데 꽃피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러한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인간생태계, 사회생태계도 그같이 되도록 애쓰고 수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