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0)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0)
현실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 16C 아나뱁티스트들은 답을 찾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가고, 초대교회로 돌아갔습니다. 당시의 개신교도들이 카톨릭 체제가 개혁되어야 한다(Reformed)고 주장할 때 아나뱁티스트들은 성경이 회복되고, 초대 교회가 회복되어야 한다(Restored)고 주장했고, 카톨릭을 포함한 개신교 진영의 국가 종교 체제는 전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현대 국가에서 국가 종교 체제는 전복되었고, 신앙의 자유는 천부적 인권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신자는 누구이며, 교회는 무엇인가”에 대해 씨름하고 있습니다. 신자 다운 신자, 교회 다운 교회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은 정확한 진술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소수일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아예 그런 문제의식조차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더 정확한 현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16C 카톨릭 종교 국가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돈으로 영생을 사고, 면죄부를 사려는 데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처럼 배금주의에 물든 현대 기독교인들도 동일한 양상을 노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날카로운 대립과 마찰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발생하면 죽고 죽이는 문제가 뒤따르게 됩니다. 그것이 인류 역사와 교회사의 증언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로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일이 없는 세상을 우리는 만들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아나뱁티스트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저항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하였지만 칼로 저항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삶으로, 인내로, 때론 도피로 저항하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도, 츠빙글리도, 칼빈도 목숨을 걸고 카톨릭 체제에 저항한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그들도 저항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에서 Protestant라고 불렸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이들 개신교 Protestant에 대해서도 저항하였고, 카톨릭 체제에 대해서도 저항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들에 대해 목숨 걸고 저항하였고 오늘도 저항하고 있습니다. 그 저항은 그들이 믿는 진리를 사수하는 투쟁이면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킬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그들에게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면서 자신들의 목숨 값과 등가의 고귀한 가치였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우리의 내적인 자유, 영혼의 자유, 영생을 얻는 자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무엇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곧 외적 관계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합니다. 국가나 제도 혹은 외부의 타자가 나의 자유를 허락하거나 보장하지 않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진리는 질식하기 시작하고 자유를 위한 장대한 투쟁이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진리를 기탄없이 말하고 자유롭게 누리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칼과 물리적 힘에 호소하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말씀에 의지해 투쟁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의지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순종하였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직하게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투쟁했지만 말씀에 따라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죽이기보다는 죽임당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를 위한 화해의 화목제물로 자신을 바쳤듯이 아나뱁티스트들도 스스로를 진리와 평화의 제단에 기꺼이 화목제물로 자신들을 바쳤습니다. 그들에게 진리와 자유와 평화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는 능력이 있고 효험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사상은 참된 믿음을 갈구하던 톨스토이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고 힌두교인인 마하트마 간디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하여 인류 문명이 평화로 나아가는 길에서 “비폭력 저항”이라는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주님 오신 후 아나뱁티스트들이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칼의 평화” 외에 “평화를 통해 평화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평화에 관한 한 인류는 아직 먼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린 양과 이리 떼가 함께 뒹굴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날,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진 날이 어쩌면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에 “새 하늘 새 땅”을 선포하실 그 날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