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 촉촉히 내리는 비를 4일 연속으로 맞으니 왜 서양사람들이 우산을 잘 안쓰는지 알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양은 애매히 비가내리니 우산을 접었다 펴는 것도 귀찮게 느껴졌습니다. 나를 보호하는 일에 지침을 느끼는 것은 불확실한 상황, 애매한 경계를 느낄 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힘 없는 나를 위해 대신 우산을 씌워주던 손길을 기억하듯 나를 보호하고 지키기위해 뱃 속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손길을 기억하고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자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존재임을 알고 포근한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눈에 보이지 않고 티도나지 않았지만 초음파에서는 작고 콩알만한 집속에 동그란 점으로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된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지만 그 동그란 점이 내 속에 생긴 순간부터 나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평생 무언가가 되기위해 노력한 적 없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자격감만으로 살아왔는데 뱃 속에 나 말고 다른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난 다음부터는 내가 줘야한다는 책임감이 따랐습니다. 아이와 나는 탯줄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나는 너, 너는 나'라는 개념으로 인식되곤 했습니다. 배가 수박만큼 커지고 아이 얼굴을 보게된 날에는 몸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기적 어기적 걸어서 내 뱃 속에서 나와 퉁퉁 불은 아이를 보려고 유리창에 코를 박고 서서 한 참을 보았습니다. 아이가 나간 자리가 '나는 나, 너는 너'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어려웠습니다. 내 뱃 속에서 나와 한 몸일 때는 내 뜻대로, 생각대로 주체가 '나'가 되어 연결되어 있었고,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발길질하며 잠을 깨우는 것 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바깥으로 나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시작할 때는 당혹스럽고 이렇게 작고 무력한 존재가 자신의 뜻을 가지고 울어대는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라 제발 기어다녔으면, 걸어다녔으면, 말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너의 생각과 뜻을 말해주면 들어줄테니 뭘 원하는지 소통이라도 하자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몸이었고 생각도 달랐기에 연결되려면 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걷고 말 할 때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소통이 되기는 커녕 아이는 위험이라는 것을 몰라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고 뜻대로 하는 것을 요구했지만 어른인 제 눈에 들어줄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었습니다. 내꺼야! 하는데 남의 것을 들고 고집을 부리고, 먹을거야! 하는데 모레나 벌레를 들고 놓아주지를 않고, 갈거야! 하는데 꼭두새벽에 놀이터를 향하거나 찻 길을 향해 뛰어가기 일쑤였습니다. 뜻을 말하기는 하는데 상식이 통하지를 않아서 무척 어려웠습니다. 무력한 아이를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주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얼른 커서 생각의 수준이 같아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늘 아이에게 무언가를 바라며 키운지 8년. 큰 아이가 8살, 작은 아이가 6살이 되었습니다. 말하면 듣고, 상식이 생겨 크게 나무랄 일이 없는데 여전히 연결된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언가 잘 못 된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가 무엇일까, 나는 정말 부모일까? 나는 아이에게 어떤 부모일까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주어진 부모의 자리를 넘어 이제는 어떤 부모라는 기준을 세우고 되기위해 노력할 때라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사전에 찾아보면 부모란,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존재입니다. 여기서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저는 집에 있는 것보다 밖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틈만 나면 바깥에서 일하고, 손볼 것을 찾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아이들은 집에서 나의 부재를 느끼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엄마! 빨리 집에 와!" 첫 째가 예배실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저를 부를 때 자주 하는 말입니다. 빨리 집에 와. 나랑 같이 있자. 아이는 이제 말로 표현을 하는데 들어주는 엄마는 없었습니다. "알았어~ 잠깐만! 너 가서 놀고있어. 엄마 조금 더 있다가 갈게." 그렇게 말만하면 들어주겠다고 해놓고, 이제는 울지않고 말로하는데도 들어주지 않으니 귀가 닫힌 엄마였습니다. 기독교인이기에 늘 들고다니는 성경책에서는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하시는데 그 말씀의 뜻도 모르고 읽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예배당에서 교제는 나누면서 집에서 아이와 연결은 되지 않는 부모였습니다.
또, 돌보다라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것입니다. 관심은 마음이 끌려 주된 의미를 두고 내 뜻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보살피는 것은 정성스레 보호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 내게 사랑 줄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이 고파서, 관심이 고파서, 내가 주기보다 더 받고싶어서 어른들에게 마음이 끌려 주된 의미를 두었고, 내 뜻을 기울여 정성스레 보호하려 교제를 나누고 연락을 하고, 온 신경을 쏟고 에너지를 쏟으며 돌보려했습니다. 그들을 돌보면 그들의 관심이 내게 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를 칭찬해주고, 인정해주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어릴 때 받지 못한 작은 아이가 여전히 내 안에 있음을 금새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뱃 속에서 나온 후부터 나를 돌봐주던 엄마의 손길, 가끔 만나던 아빠의 눈길을 얻고자 울고 말했지만 떼쓰고 얻기까지 요구하는 성격이 못되었습니다. 어른들은 제게 울지도 않는 착한 아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나를 묶는 칭찬이 되고, 의젓하게 행동하면 돌아오는 부모님의 칭찬과 인정에 묶이고, 안정되지 못하고 아프기도 했던 엄마를 돌보기 위해 8살 때 밥을하고, 계란을 지지고, 청소를하고, 동생을 돌보는 동안 사랑과 관심, 연결을 원했던 아이의 욕구가 눌리고 뭉치다 눈덩이처럼 불어나 지금에서야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어릴 때 하지못한 것들을 하느라 내 아이에게 똑같은 아픔을 주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와 연결될 수 없었습니다. 나의 아이 또한 불확실한 엄마의 태도, 간혹가다 엄마같고, 간혹가다 요구하며 빨리 어른이 되라는 두 얼굴 앞에서 헷갈렸을테고 애매모호하게 돌보는 듯 관심을 갖는 듯한 태도에 지쳐 점점 빨리오라는 말도 안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청소년이 되면 아이는 더이상 집에서 엄마를 찾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랬듯이요. 엄마의 마음에서 자신이 주된 관심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애교를 부리고, 착한 일을 하고, 말을 잘 듣는 것도 멈출지도 모릅니다. 엄마의 보호를 받기 위해 미숙하게 행동하거나, 못하기도하며 도움을 청하던 것을 멈추고 어린나이부터 못하는 것 없이 제 스스로 찾아서 하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라는 마음조차 잊고 위험한 상황으로 속절없이 빠질지도 모릅니다. 제가 자신보다 남을 더 돌보며 위태로운 경계를 오고가며, 체력의 한계를 잊은채 움직이다 주위에서 '초림이는 한 번 몸살나서 누워 아무것도 못해봐야 안할지도 몰라.'라는 말을 듣는데도 깨닫지 못했던 것 처럼말입니다.
저희 할머니는 먹고살기에 너무 바빠서 자신의 몸이 아픈 것도 잊은채 움직이고, 무릎이 아픈데도 일을 놓지 못하기 일쑤였습니다. 자식을 낳고서도 일이 우선이라 제대로 자신과 자녀를 돌보지 못하고 자신과 자녀에게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그 속에서 자란 우리 부모님도 돈이 목표가 되고, 자녀와 함께하는 삶보다 먼저 자신의 삶을 찾고자 하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나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님과 나는 살아가는 환경이, 추구하는 이상이 다르기에 무엇을 보고 따라야하는지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공동체를 만났을 때 중독자들을 향해 부모가 되어 살아가시는 목사님, 사모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공동체를 집으로 삼아 명절에도 자리를 비우지 않으시고 중독자들과 함께 음식을 하고, 먹고, 자며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집에서 중독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도 그 집 안의 자녀가 되어 함께 먹고 자고 시간을 보내며 돌봄받았습니다. 관심을 나에게 두어 동반의존과 성중독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무력한 나를 가르치시고, 시간을 내어 두시간씩 상담을 하시고, 정성스레 보호하기 위해 이혼과 남성의존으로 위험한 순간에 이르기 전마다 세심히 살펴 상태를 묻고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해야할 것, 의존을 끊기 위해 해야할 것들을 일러주시며 보호하셨습니다. 어린시절의 결핍이 있음을 아시고 내게 필요한 것이 부모와 연결되는 것임을 알려주셔서 성숙하게 대면하고, 충족되게 연결되도록 마음을 지지해주어서 얼마 전에는 엄마, 아빠와 만나기도 했습니다. 제게는 엄마, 아빠와 1:1로 대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기에 정말 기적과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내가 왜 나의 가족과 연결되지 못하고 겉도는지를 알게되니 엄마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가족끼리 제대로 살아보라고 공동체 바깥에 집을 얻고 분가할 준비를 함께해주셨습니다.
이런 연결의 경험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다시 알아갑니다. 내가 잊고 살았던 상처와 결핍으로 돌아가서 싸매어주실 때 현재 삶에서 영향을 미치던 것들이 줄어감을 봅니다. 내가 나의 아이에게 같은 결핍을 만들어내며 나는 괜찮은 부모라고 자만하고 교만할 때 따라가야할 사람을 보여주심으로 내가 얼만큼 잘못왔는지 깨닫게 해주십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해야할 것들을 알려주심으로 불확실하거나 애매한 경계에서 벗어나 확실히 보호받고 확실히 보호하는 부모로 나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나도 모르게 나와 연결되어있었습니다. 나를 놓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두지 않고 나를 보호하시고 귀하다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한 주를 보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미숙한 부모와 가엾은 나의 아이들에게 행하신, 주인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노인팅 - 온 땅의 주인>
온 땅의 주인 되신 주님이
내 이름 아시며 상한 맘 돌보네
어둠을 밝히시는 새벽 별
방황하는 내 맘 주의 길 비추시네
나로 인함이 아닌 주가 행하신 일로
나의 행함이 아닌 오직 주로 인하여
나는 오늘 피었다 지는
이름 없는 꽃과 같네
바다에 이는 파도
안개와 같지만
주는 나를 붙드시고
부르짖음 들으시며
날 귀하다 하시네
주님은 나의 죄를 보시고
사랑의 눈으로 날 일으키시네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듯
내 영혼의 폭풍 고요케 하시네
나로 인함이 아닌 주가 행하신 일로
나의 행함이 아닌 오직 주로 인하여
나 오직 주의 것
나 오직 주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