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돌보고 보호하는 것
라파공동체2026.03.28 15:232
* 이번 주는 여러 생각이 많았기에 그간의 생각을 합하여 하나로 만든 글입니다. 툭 내려놓듯 써내려가기위해 글 교정을 최소화하여 글의 말미가 존칭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아마 저는 존칭이 노력해야 나오는 스타일인가 봅니다. 요즘의 고민이지만 나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나의 것을 찾는 것이 간절한 일상입니다. 숨쉬듯 자연스러운 내가, 하루의 80%이상이 되기를 소망하고 소망합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닭은 수탉이라 몸집이 제법 크고 털도 새하얀 색으로 참 멋지다. 그 멋진 닭이 우리 집에 와서는 늘 상자 두 개를 포갠 곳에 가둬놓는 것이 안쓰러워서 하루 두 번 산책을 시킨다. 사실 집 앞 마당에 그냥 방생한다. 말 그대로 방생, 내게 잡혀 집 안에 갇혀 사는 느낌이라 놓아주듯 마당에 풀어놓는데 다시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지만 산책은 늘 방생의 마음으로 놓아주듯 했었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이 ‘고양이한테 잡아먹혀.’ 라고 하길래 ’산책을 안 시킬 수는 없잖아, 매일 집 안에 갇혀 사는데. 그리고 혹여라도 잡아먹힌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고양이도 본능이 있는데.’ 라고 반문했더니 나의 몸이 굳어지는 말을 했다. ‘보호하는거야. 가둬 둔 것이 아니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것은 보호야. 아마 당신이 보호받았다는 느낌을 가져보지 못해서 가둔다고만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어. 산책시킬 때에도 옆에서 종종 지켜봐줘야해. 그냥 저렇게 놔두면 잡아먹힐거야.’ 남편의 말을 듣는데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다. 가둔 것이 아니라 보호였구나.
나는 늘 반려 동물에 대해 생각하노라면 어느 동물이라도 우리 집에서 잠시 머무는 것은 좋지만 키운다는 것은 몹시 자연의 이치와 맞지 않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건물 안에 가두고 물과 밥을 주고 산책을 시킬 때에만 바깥 구경을 시키는 일은 노상 바깥에서 살았어야 할 동물에게 할 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돌봄과 보호는 건물 안에서 할 것이 아니라 동물 스스로가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런 힘이 이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이 가깝고 안전이 확신되는 곳에서는 가능한 말이지만 아마 도심 속 차들과 위험요소가 많은 곳에서는 어려우리라. 오랜 세월 사람의 손길을 받아들인 동물들은 서서히 제 스스로 하지 않은 것이 익숙해져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에 닭을 들일 때에도 나의 애정으로 마음까지 주기위해서가 아닌 아이의 요청에 따라 집안으로 들여온 것이기에 내게 사랑이 부족하다 생각은 했지만, 사랑이 아니어도 그 닭을 향한 생각은 남편과 내게 무척 다른 관점이어서 순간 온 몸이 굳어진듯 하며 생각이 많아졌다. 어릴 적 남편은 소위말하는 과잉 보호의 대상이었으며 나는 방치되었던 시간이 많은 자유분방한 사람이었기에 자란 환경의 경험에서 닭 한 마리를 보고 하는 생각이 이토록 다를 수 밖에 없나보다. 우리의 중간 지점을 찾기로하고 남편의 말을 따라 집 안으로 데리고 오기까지 방생이 아닌 산책으로 우리 주변을 함께 하도록하며 곁눈질로 늘 살피다 데리고 들어오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스스로 하는 것과 돌봄과 보호라는 단어가 내게 깊이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내게 돌봄과 보호는 앞으로 어떤 변화를 주는 단어가 될까, 어떻게 받아들여 내게 적용할까 고민할 즈음 닭에게서 내 모습이 보여 괴로운 일이 생겼다. 닭을 키우며 한 번도 ‘닭 대가리’라는 말에 동의한 적이 없다가 이번 주 비온 뒤 처음 날이 맑아 산책시켰을 때 그 말에 동의하게 되었는데 부르면 내달려 오거나 대소변을 가리는 것은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그러려니 했지만 마당에 놓아준 후 일을 마치고 데리러 갔을 때 고양이에게 쫓기는 닭이 제 몸 피할 곳 하나 찾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숨은 곳이 고양이가 자주 눕는 고양이 전용 장소인것을 보고 닭 대가리! 하고 탄성이 나왔다.
달릴 힘이 있는 노란색의 곧은 두 발은 제 몸하나 숨길 곳 찾기가 그렇게 어려웠는지 애써 힘주어 내달린 곳이 고양이 집이라니. 닭은 산책시키려 마당에 데리고 가면 내 팔 위에 매달려 있다가 날개를 푸드덕 거리며 땅으로 내려간다. 이리저리 걸으며 땅에 있는 곤충을 잡아먹다가 조금이라도 큰 소리가 나면 살피지도 않고 근처 그늘 속에 몸을 숨길 뿐이다. 이런 닭은 나와 같다.
근래들어 나의 문제에 집중하고 나의 가족이 먼저라는 것을 생각하며 타인중심이 아닌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이 치료의 시작일 것 같아 몹시 애쓰고 있었다. 내 밥이 식도록 가만히 놔둔채 타인먼저 챙기기 바쁘고 요청하지 않아도 먼저 손을 뻗어 도와주는 내 모습은 스스로도 불편하지만 나의 빈 자리를 바라보며 지내는 가족들이 유독 불편하다고하여 서로에게 좋아지기 위해 자중해야겠다 마음먹었으나 내 마음과 몸은 닭과 같이 푸드덕 거리는 날갯짓을 하며 착륙지도 모르고 날기 바쁘고 숨을 곳도 모른채 다리에 힘주어 내달려보기부터하며 도무지 멈출줄을 몰랐다. 집에 돌아와 혼자 가만히 자리에 앉거나 누우면 후회되는 순간들 투성이었고, 자괴감이 들었다. 내게는 이렇게 노력해도 어려운 일이 남보다 내 것 챙기는 것이라니. 남 눈치보는 것이 몸에 깃든 습관이고, 기대에 충족시키기 위해 내달려야만 하고, 스스로 기대치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몸에 힘주어 나아가야하는 내 모습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모습이다. 멈추기가 몹시 괴롭다.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자괴감과 좌절이 지친 마음을 위로할 줄 몰라 애써 끌어안고 잠을 청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지? 평범한 것은 뭐지? 나부터 챙기는 것이 평범한 것인가, 내 것만 우선인 것이 평범한 것인가. 남과 더불어 살면서 남이 먼저가 아니라 나를 먼저 챙기고 보호하는 것이 나는 왜 당연히 되지 못하고 노력해야만 할 수 있을까. 나를 먼저 돌보지 못하고 사랑하고 아끼지 못해 괴롭고 지치는 순간들이 떠오른다. 남과 나 사이에서 늘 중간 없이 양 극을 달리던 내게는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서글픈 것은 나로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서른이 넘어도 닭처럼 몸에 힘주어 내달리기 바쁜 나라니. 이전에 상상했던 서른과 너무 달랐다. 현재의 힘듦을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모든 것이 변하겠지 막연한 기대로 버텼었는데 그 미래가 현재가 된 지금 몹시 어둡고 지치고 힘든 시간을 통해 나를 찾아가려 애쓰고 애쓰는 과정인 것이 괴롭다. 어릴 때야 주변에서 영향받는 것을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어른이기에 내 스스로 이 순간의 긴 터널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빛이 보이기를, 더 밝은 빛으로 곧 나갈 순간이 내게도 찾아오기를. 터널을 나갔을 때에는 남과 나 사이에서 더이상 양극단을 달리지 않고 내게 만족하며 가족에게 만족하는 순간이 되기를. 나를 보호하고 나를 돌보는 것을 숨쉬듯 잘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바래본다.
이런 생각이 밀려올 즈음 공동체에서 지내다 나간 형제님이 대학교에 입학해 한 학기 열심히 공부하여 1등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단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왔길래 얼굴을 마주보며 축하한다고 말했는데 형제님이 가고 난 후 목사님께서 염려되는 것이 있는데 말을 하지 못했으니 이후에 연락해야겠다고 하시며 1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부모의 기대와 교수의 기대에 나를 맞추려 애쓰다보면 재발한다. 스스로 기대치를 높여가는 것이 문제고 과도히 기대를 충족시키려 애쓰는 것이 문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 형제님도 나와 같이 멈추지 못하는 것이 있나보다. 나는 누구의 기대에 따라 움직였나, 누구에게 맞추기 위해 애썼을까. 나는 어떤 1등아 하고싶었던 것일까. 형제님의 얼굴이 지치고 힘들어보였는데 우리는 둘 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 지치고 지쳐있나보다. 끝없이 불안한 마음을 타인에게 애쓰고 노력하며 듣는 말로 위안삼으려 했으나 이제는 나를 위해 스스로가 돌보고 보호하는 일에 애쓰고 노력하기를, 그리고 곧 나를 찾음이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숨쉬듯 자연히 되어지기를, 다음에 만날 때에는 그런 우리가 더 성숙한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기를 바래본다. 그리고 내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 질문에 답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어떤 1등을 하고 싶었을까, 누구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애썼을까, 나를 바라보는 그 사람의 기대치를 높여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대상은 없고 형태만 남아 빈 껍데기로 나를 움직이게 하는 이 순간에서 벗어나 타인이 아닌 스스로 나를 돌보고 보호하며 나를 위한 움직임에 힘쓸 수 있기를 소망한다.